[탐사#01] 조선시대 10대 대로, 삼남대로 갈재 옛길, 군령다리를 찾아서

조선시대 한양에서 전국 각 지방으로 가는 ‘10대 대로’가 있었다.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에 삼남대로에 있는 갈재 옛길을 찾아봅니다. 여기서 삼남이란 한양을 중심으로 남쪽의 3개 지역 충청, 전라, 경상을 말한다.

조선시대 10대 대로는 한양에서 의주까지 가는 의주대로, 함경북도 경흥까지 가는 경흥대로, 강화까지 가는 강화대로, 수원까지 가는 수원별로, 충남 수영까지 가는 수영별로, 통영까지 가는 통영대로, 동래까지 가는 영남대로, 봉화까지 가는 봉화대로, 울진 평해까지 가는 평해대로, 그리고 한양에서 해남까지 가는 삼남대로가 있다.

이러한 간선로(幹線路)들은 당시 국가에서 지정한 주요 도로였다. 당시는 주로 걷거나 마차 혹은 말을 타고 다녔다. 이 길들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철도가 놓이거나, 현대에 들어서 고속도로와 택지개발로 인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옛 모습을 어렴풋이 남기고 있는 몇 안 되는 길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길이 바로 한양에서 해남까지 가는 삼남대로에서 전북 정읍과 전남 장성의 경계, 갈재를 넘는 길이다. 

정읍 군령마을에서 해남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또는 남쪽 해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올랐던 삼남대로 갈재 옛길 정상 아래, 지금은 자그만치 4개의 도로와 철도 터널이 뚫려있다. 폐로가 된 일제시대 만든 옛 철길까지하면 5개의 터널이다.

갈재구글어쓰맵2
구글 어쓰로 내려다 보면 삼남대로길 갈재고개 아래 첫 마을, 군령마을(군령다리)을 국도1호선, 호남고속도로, 호남선, 호남고속철도 모두가 통과한다.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 한 눈에 확인된다. 과거 군령다리 거주민은 지금과는 다르게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며 전답 또한 상당한 규모로 동그라미 전체 구역에 넓게 분포하였다. 1970년대 호남고속도가 마을을 관통하는 형태로 건설되면서 고속도로 노선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현재의 마을위치로 모두 모이게 반강제 이주(?)되었다. 현재 마을터 윗 쪽 마을 대부분은 그때 산중턱 깎아서 새로 만든 마을 터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호남고속도 부지는 과거에는 대부분 전답이거나 거주민이 살던 거주지였다. 그 옛날 삼남대로 갈재 고갯길로 들어가는 바로 옆길을 호남고속도로가 같이 걷는다.

 

갈재의 역사

갈재 정상은 암벽을 깎아 만든 길로 정읍과 장성을 연결한다. 깎아 만든 암반의 벽에는 홍 부사가 길을 만들어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자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갈재는 노령이라고도 하고 위령이라고도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정읍현 산천편에 갈재를 가리켜 ‘위령(葦嶺), 위는 혹 노(蘆)로도 쓴다.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장성현의 경계다’라고 되어 있다. 갈재가 장성과 정읍의 경계임을 나타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장성현 기록에 따르면 ‘갈재는 위령(葦嶺), 노령(蘆嶺)이라고도 하는데, 현 북쪽 30리에 있으니, 요해(要害)의 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자로 위(葦)와 노(蘆)는 모두 갈대를 의미한다. 즉, 갈재는 갈대가 많아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노령보(蘆嶺堡)는 고갯길이 험악하여 도적이 떼를 지어 있어 대낮에도 살육과 약탈이 일어났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하여 방수하다가 뒤에 폐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입암산과 방장산의 협곡을 잇는 갈재는 전남 내륙지방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하지만 도적이 많아 길손들이 함께 모여 다니거나 장성이나 정읍의 원(院)에서 쉬며 정보를 주고받으며 안전하게 길을 건너야 했다. 장성이나 정읍에는 극락원(極樂院), 연화원(蓮花院), 미륵원(彌勒院)과 같은 원들이 많았다.

갈재길

갈재구글어쓰맵1
구글 어쓰로 내려다 보면 갈재 넘는 안전하고 빠른 길이 눈에 보인다.

 

갈재에서는 동쪽 내장산 방향으로는 입암산과 서쪽으로는 방장산, 축령산 등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입암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 중 하나로 천혜의 요새다. 동학운동의 피신처로도 알려져 있다.

서쪽 입암산 너머는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연결된다. 갈재에서 내장산은 보이지 않지만 입암산성 봉우리 끝에 있는 갓바위를 볼 수 있다. 갓바위는 천혜의 요새인 입암산성의 최고 높은 위치에서 주변을 모두 관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갈재 너머 정읍 방향 첫 마을이 군령마을이다. 갈재의 위령군보와 입암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머물던 군대가 주둔한 자리라고 한다. 

삼남대로 옛길 갈재 고개 정상. 그 옛날 암반을 깎아내고 그나마 이만큼의 공간을 만들었다.
삼남대로 옛길 갈재 고개 정상. 그 옛날 암반을 깎아내고 그나마 이만큼의 공간을 만들었다.

 

간선로, 대로라고 하기에는 좁디 좁은 이 산꼭대기 대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땅끝마을 해남에서 한양을 오갔을 것이다.  한양을 떠나 귀양갈 때도, 과거보러 한양갈 때도... 

일제시대 만들었던 옛 철도 터널 폐로
일제시대 갈재 고개를 대신할 용도로 그 아래 만든 철로 터널.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가 1980년대 옆으로 철도 노선이 옮겨지면서 지금은 폐로가 되었고 터널만이 남아있다. 군령마을에 있다.

 

신경숙,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의 갈재의 현대사

아버지는 갈재를 두고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가보려고 하면 아니라고 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가보려고 하면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아 애를 먹인다고, 게다가 갈재는 경사가 가팔라서 찾는 사람이 드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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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갈재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목란마을과 J시의 입암면 군령마을 사이에 있던 길" 표기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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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재에 숨어든 인민군들은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왔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산생활을 하는 동안 먹을 양식이었다. 집집마다 숨겨둔 곡식이 털렸과 닭이 모가지를 비틀린 채 잡혀갔고, 다음해 씨앗용으로 쓰려고 문간에 걸어둔 옥수수마저 걷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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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갈재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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